수필춘추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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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수필

이영진 <큰 산, 그 마지막 무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11-27 00:54
조회
249
큰 산, 그 마지막 무대
이영진

이인영 교수님 ‘미수米壽 렉쳐 콘서트’ 초대장을 받았다.
1990년대 서울대 오페라 <파우스트> 조연출을 하면서 이인영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강렬한 카리스마는 옆에만 있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오현명 선생님과 함께 베이스로 우리나라 성악계를 대표하신 분이다.
선생님 연출은 치밀하셨다. “이 음악에서 고개를 들고, 이 음악에는 몇 걸음 걷고, 이 음악에 돌아봐라. 이 음악에 등장해서 이 간주 때 움직이고, 이 음악에서는 지휘자를 봐라.” 하고 섬세하게 주문하셨다.
선생님은 나에게 오페라에 쓸 소품으로 깃발을 만들어 오라고 하셨다. 그림 재주도 없거니와 천, 물감 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다가 미대를 찾아가 학생들에게 사정 얘기를 했다. 처음에는 잡상인 취급하던 미대생들이 재미있어 하며 깃발이며 창, 방패 같은 소품을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미술계 친구들을 좋아하는 것은 그때의 고마움 때문일 것이다.
만들기 어려웠던 소품은 큰 오크통(참나무 술통)이었다. 만들다 지쳐서 나중에는 레스토랑에서 사정하고 빌려왔다. 이 모든 과정을 선생님은 지켜보신 것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선생님께 진행 경비를 할당 받아 소품을 사고, 만들고, 저녁에는 연습을 하고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곤 했다 한 달 넘게 지켜보시던 선생님은 교수실로 나를 부르셨다.
“어디 이씨냐? 고향은 어디냐?” 대뜸 물으셨다. 전주 이가 효령대군 21대 손孫이며, 고향은 제주도라고 말씀드렸다. “어 이거 촌놈 아녀.” 하셨다. 그 후로 선생님은 내게 ‘이군’ 또는 ‘촌놈’이라고 부르셨다. 선생님이 부산 출신이라 촌놈이라고 하시는 게 친근감의 표시였다. 연습실에서도 ‘이군’이라고 부르셔서, ‘이름 놔두고 뭐여. 내가 학교 급사여 뭐여.’ 속으로 투덜대기도 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물으셨다. 나는 조연출하면서 조금 모아둔 돈으로 독일이나 이태리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돈은 얼마나 있느냐고 물으셨다. 한 이백만 원 모아둔 게 있다고 하니, “임마, 비행기 값도 안 된다.” 하시며 껄껄껄 웃으셨다. “야, 니 일본 가라. 내가 일본 문부성 장학생 시켜줄 테니까. 일본 가서 공부해라.” 하셨다.
일본어는 한마디도 못하고 일본은 생각도 안 해봤는데, 교수님 덕분에 제주도 촌놈이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일본에 오시면 늘 내게 연락하시고, 언제나 오차노미야 YMCA 건물에 묵으셨다. 항상 줄서서 먹는 유명한 길 건너 돈가스 집에서 점심을 사주시고, 조그만 길모퉁이 찻집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옛날 해방 후에 일본 유학 와서 저 식당에서 밥 묵고, 여기 이 자리에 앉아 향수에 젖어 글을 썼노라고 회상하며 옛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지만 생활에 쫓겨 교수님을 찾아뵙지 못하고, 스승의 날이나 명절 때 조그만 선물로 감사의 뜻을 전하다가 덧없는 세월만 흘렀다. 어쩌다 한번 교수님을 뵈면, 이제는 “아이고 이 선생” 하며 반가워하신다. “교수님, 무슨 이 선생입니까. 그냥 ‘이군’이라고 예전처럼 불러주십시오.” 하면, “아이고 이리 큰사람 되었는데 우째 이군으로 부르겠노.” 하신다. 선생님은 나를 큰사랑으로 키워주신, 잊을 수 없는 스승님이다.

오늘 선생님의 ‘미수 렉쳐 콘서트’를 객석에서 보았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공연이다. 내가 무대감독으로 무대 뒤에 있어야 하는데, 공연 내내 죄송스러웠다. 교수님 제자들로 구성된 ‘이 마에스트리’ 공연과 교수님의 해방 전후 한국 성악 발자취에 대한 해설이 있었다. 간간이 지휘자의 만담이 있었고, 마지막 앵콜곡으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했다. ‘황제 이인영 교수님을 위한 노예들의 합창’이라며 감동적인 합창이 이어졌다. 휠체어에 의지하신 마지막 교수님의 무대인사에서 관객 600명의 기립박수와 세 번의 커튼콜 무대인사가 이어졌다. 감동의 물결이 일렁였다. 오랜 역사의 결실은 이런 것이구나, 온몸으로 전율했다. 박수치는 관객도 교수님도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무대는 절절한 여운으로 남았다. 공연을 마치고 선생님은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나는 인사드릴 기회도 없이 물러나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를 찾아 손짓으로 부르셨다. 군중을 헤치고 휠체어에 다가가 선생님께 꽃다발을 드리고는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 맞추며 눈물만 흘렸다. 선생님도 말없이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셨다. 감사하다고, 큰 은혜 잊지 않겠다고 말씀드리려 했는데, 생각만 하고 말하지 못했다.

축제의 끝. 그 허무함을 아는가.
화려한 불꽃놀이 뒤에 오는 허무함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또 하나의 세월이 간다.

콘서트 프로그램 말미에 쓰여 있는 글이다.
화려한 공연 후에 찾아드는 허망함…
오늘 큰 산의 마지막 무대를 보았다.
그 후, 어느 날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노량진 횟집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드시며 예전처럼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부산 영도 바닷가의 가난한 소년이 교회 오르간 소리에 끌려 처음 음악을 접한 이야기, 성악 공부를 하려고 일본으로 밀항한 이야기, 일본 유학 중 슬프고 아름다웠던 이야기. 그리고 귀국하여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종로 3가 선술집이 아지트였는데, 종로5가에 있던 서울대에서 수업을 끝내고 가면, 오현명 선생님을 비롯한 성악가, 화가, 영화평론가 등 술친구들이 모여 이층 다락방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나마 월급이 제때 나오는 서울대 교수였던 이인영 선생님이 주로 술값을 내셨다고 하시면서, 노랭이 오현명 선생님 이야기도 하셨다. 밤새 술 마시다 취해 자고 일어나보니 다들 없어져서 무슨 돈으로 술값을 계산했을까 했는데, 자고 있던 이인영 선생님 시계를 풀어다 맡겼다고 한다.
지금과는 다른, 그 시절 예술가들의 낭만적인 삶을 이야기하셨고, 또 이러한 지나온 삶을 남기고 싶어 하셨다, 누가 이 이야기를, 무대 뒷이야기들을 정리해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제가 조만간 정년퇴직이니, 매일 선생님 댁으로 출근하여 자서전을 써 드리겠습니다.” 하니 크게 기뻐하셨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슴에 간직한 채, 내 정년이 되기도 전에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여행을 떠나셨다.

이영진: 1961년 제주 출생. ROTC(학군) 22기. 휘문고, 동국대 무역학과, 경희대 대학원 극장경영 전공.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도일度日. 동경실내가극단, 일본 극단 ‘사계四季’ 5년 근무. 귀국 후 극단 ‘학전’ 등 무대기술감독으로 활약. 현재 고양문화재단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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